(물론 쿠키가 남아있다면 주소창에 F만 치더라도 페이스북이 가장 상단에 엔터 누르라고 재촉하고 있다.)
페이스북을 처음 했을때를 떠올려봤다. 2009년 입대하기 전 그 당시에는 싸이월드가 한창 유행이었다.
그렇게 싸이월드가 우리의 온라인내에서의 공간을 장악하고 있을 때 입대를 했고,
그것을 통해 친구들과 소통을 했다.
그러다 전역을 몇개월 앞둔 시점, 친구들이 대거 페이스북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싸이월드를 사용하는 친구들이 몇 남지 않았기에 나도 한번 시험삼아 해볼까 했던 것이
그렇게 중독까지 와버린 것이다.
페이스북을 좋아해서 시작한 건 아니지만 누구보다 페이스북에 열정을 쏟았다
분명 순기능도 많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사를 간 탓에 연락이 끊긴 초등학교 친구들.
오랜 기간 연락하지 않아서 안부가 궁금하기도 한 중고등학교 친구들.
그리고 잘 알진 못하지만 어떻게 살고 있나 궁금한 친구들.
싸이월드는 대개 폐쇄성이 짙었다. 그래서 위에 열거해둔 친구들의 정보를 알기 위해서는
'일촌'이라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페이스북은 대부분 쉽게 둘러볼 수 있었다.
어딜 다녀왔는지, 누구를 만났는지, 어떤 친구들과 어울리는지.
그리고 내가 직접 찾아내지 않더라도 친절하게 친구추천에 그들이 떠있었다.
그렇게 연락이 끊긴 친구들과 다시 연락이 가능해졌고
많은 친구들의 일상이 그 곳에 들어가면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페이스북으로 넘어왔을 때 싸이월드를 고집했던 친구들도 마지못해 넘어오곤 했다.
나 또한 열심히 '자랑'이라는 명분보다 '공유'라는 합리화적 명분으로
페이스북에 열심히 게시글을 올리기도 했다.
역기능,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갉아먹다.
그런데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문제가 발생했다.
페이스북을 해도 기쁘지가 않았다. 아니 좋을 때도 많았지만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때도 말았다.
언제 기분이 좋지 않은지 곰곰히 분석해봤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 즉 결핍에 의해서였다.
내가 그렇게 몇년동안 페이스북을 사용하는 동안 "행복"이라는 감정은
조용히 절대적인 판단에서 상대적인 판단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밥을 먹거나, 공연을 보거나, 여행을 가더라도 온전히 내가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지금 하는 행동들이 쇼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성격의 문제로만 단정짓기에는 많은 친구들이 이런 문제를 실토했다.
나만의 고민이 아닌 우리의 고민이었던 것이다.
어떤 친구는 나를 바라보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고,
나는 또 어떤 친구를 보면서 부러워하고 있었다.
그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위해 우리는 암묵적으로 더 열심히 더 멋있게 사는 것처럼
일상을 좀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처럼 꾸미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꾸밀수록 부러움을 느끼는 대상의 상대적 박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기껏해야 학교, 도서관, 가끔 술 한잔, 학원 등등의 단순한 내 일상과
패밀리 레스토랑, 놀이공원, 해외여행 등등 일상이 특별한 그들의 일상은
차이가 나더라도 너무 차이가 났다.
그런 모습을 보면 볼수록 열등감은 커져만 갔고, 상대적 박탈감도 뒤따라왔다.
그들 인생의 하이라이트 씬과 내 인생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비교한다는 것이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망각하고 말이다.
성격도 고약해졌다.
이곳 저곳 달린 답글들을 바라보면서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는건가,
저 친구들은 그냥 '부럽다' '좋겠다'라는 감정에서 끝나는 건가.
그래서 좋아요. 라는 버튼도 막 눌러줄 수 있구나.
내가 그 버튼을 한번 눌러주기에는 장고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마침내 눌렀던(또는 남겼던 답글) 좋아요가 나에게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걸 의식한 후
쟤는 왜 안 남겨?(안눌러?) 라는 생각과 함께심히 불편했다.
보상심리가 작동했던 것이다.
내 잔잔한 삶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
떨쳐내고 싶었다. 아니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떨쳐내야만 한다.
그래서 가끔씩 비활성화도 하면서 발악해봤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안하면 도태되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웃기라도 한 듯 페이스북은 점점 변질했다.
타임라인에는 친구들의 좋아요를 통해서 흘러온 저품질의 게시글들만 난무했다.
이제 친구들 게시글에서 느꼈던 괴리감이 페이스북 헤비유저들로 이동했던 것이다.
유튜브, 페이지, 그룹 등등 흘러오는 방법들은 다양했고
그럴수록 점점 페이스북의 순기능은사라져가고 있었다.
생각을 바꾸다.
큰 결심을 했다. 페이스북을 끊기로 했다.
기존에 비활성화했던 마음가짐과는 확연히 달랐다.
발악을 넘어서 더이상 그 곳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페이스북 아이디를 만드는데는 2분이 채 안걸리지만, 삭제까지는 2주 넘는 시간이 걸린다.
2주동안 참 괴로웠다. 가끔 술이라도 먹고 들어오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f를 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들어가는 순간 비활성화는 풀리고 다시 삭제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2주를 기다려야한다.
다행히 2주를 참았고 페이스북을 내 일상에서 떨쳐냈다.
친구들이 없어지는건 아닌지.
나만 도태되는건 아닌지.
불안하기도 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사실 페이스북 내에서의 친구들은 그저 보여주기 식의 필요에 의한 껍데기에 불과했다.
필요에 의해서 얽힌 관계는, 그 필요성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으면 자연스레 멀어지기 마련이다.
정말 그랬다. '친구'라는 가면을 쓴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졌다.
오히려 친구들이 없어지는건 아닌지 걱정했던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서가 아닌
전화 또는 카톡으로 연락해오는 몇 안되는 친구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페이스북을 탈퇴하고 한달이 지난 시점, 내 생일이었다.
페이스북을 했었다면 생일 알람을 통해 수십명의 친구들이 축하한다고 글을 남겼을 테지만,
기껏해야 2~3명정도의 친구들만 문자나 카톡으로 축하한다고 보내왔었다.
더 안좋은거 아니야?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의 제목처럼
내가 생활방식을 소유에 맞추고 있느냐, 존재에 맞추고 있느냐에 따라
내 삶이 보잘 것 없더라도 오히려 더 만족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 페이스북 아이디가 없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가끔 정보를 받기 위한 용도일뿐, 더이상 전과 같이 사용하지는 않는다.
5개월 넘게 하지 않고 있으니 굉장히 편하다.
더이상 친구들에게 내가 까먹고 있던 내 일상을 안들어도 되고, 또 박탈감을 느끼지 않으니 말이다.
가면을 벗고 내면 들여다보기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넓히기 위해 가면을 쓰곤 한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사람을 만난다는건, '나' 본연의 태생적 찌질함을 숨기고
멋진 사람으로서 상대를 대해야하므로 참 힘든일이다.
페이스북 내에서 본연의 찌질함을 겸비한 '나'가 아닌 근사한 가면을 쓴 '나'는
남들에게 멋진 사람일지 몰라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가혹한 사람이다.
밖을 향해 바라보는 것도 좋지만, 내면. 안을 바라봐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출처 http://symany.tistory.com/160